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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같은 바보들의 이야기가 넘쳐나길

JUdy 0 9,503 2011.07.27 22:13
울리히 같은 바보들의 이야기가 넘쳐나길

뚜르 드 프랑스는 6월과 7월에 걸쳐 24일간 열리는 유서 깊은 사이클 경기입니다. 이 경기는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스포츠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프스의 푸르고 울창한 숲길, 피레네 산맥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 사이의 아찔한 길, 수평선을 따라 아늑하게 펼쳐지는 프랑스 해변의 시골길을 거쳐 마침내 영광의 종착점인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에 이르는 그야말로 환상의 코스입니다.

선수들 뿐만 아니라 스포츠 기자들까지 선수들을 따라 자전거와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한여름의 더위를 열정으로 불태웁니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한 선수는 챔피언의 상징인 노란 셔츠를 입고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뜨거운 불볕더위와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인내와 투지는 꼭 우승자가 아니어도 모두가 찬사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대단한 경기임에 틀림없습니다.

2003년 뚜르 드 프랑스의 영웅은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이었습니다. 암스트롱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역사상 최고의 사이클리스트'라는 명예를 부여해주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또 다른 명예로운 타이틀이 하나 더 주어졌습니다. '인간 승리의 신화'라는 타이틀이 그것입니다.

그는 고환암이라는 치명적이고 무서운 병을 얻어 2년간 고생을 하였고 그의 5연패 뒤에는 그러한 절대 불가능을 이겨낸 불굴의 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5연패는 단순한 승리의 연속이 아니라 묵직한 인간 감동의 스토리로 미국인들의 자존심이 되었습니다.


▲ 얀 울리히를 바보라고 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명예와 신화 뒤에는 감추어진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얀 울리히라는 독일 선수입니다. 그는 암스트롱이 우승을 하는 5년 동안 계속해서 2위에 머물렀던 비운의 선수입니다. 그야말로 울리히에게 암스트롱이라는 존재는 숙적이며 극복해야 할 마지막 목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2003년 대회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7월 22일 불과 15초 차이로 울리히를 앞서 가던 암스트롱이 어이없게도 구경을 나왔던 한 어린아이의 가방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뒤를 바짝 좇고 있던 울리히가 쾌재를 울리며 지나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울리히는 그를 지나쳐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암스트롱은 이미 4년이나 연속으로 우승한 선수였습니다. 자신은 4년간 줄곧 그에게 뒤져 2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챔피언이 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여길 수 있는 절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호의 기회의 순간 울리히는 자신의 사이클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암스트롱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암스트롱이 다시 페달을 밟고 출발하는 순간 울리히도 페달을 밟아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결국 울리히는 61초라는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암스트롱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2003년 암스트롱의 위대한 금자탑이 되었던 5연패는 울리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그를 바보라고 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넘어진 암스트롱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주었던 울리히를 사람들은 '위대한 멈춤', '신성한 양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암스트롱의 우승보다 더 값진 위대한 인간 승리이며 영원한 스포츠맨쉽의 표상이요, 원숙한 인간미를 지닌 인격의 표상으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한국인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한국 교육은 경쟁을 실질적 교육 목적으로 채택함으로써 경쟁에만 강한 인간을 기르고 있습니다. 며칠 전 벤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골인 직전에 일어났던 일은 그런 우리의 현실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쟁에 강한 인간이란 타인을 모두 라이벌로 보는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동물과 동물의 관계로 전락시키고, 사람을 물건으로 전락시킵니다. 결국 경쟁에만 강한 인간은 남을 물질화하거나 동물화하는 비인간화의 주역이 됩니다.

그런 인간이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라이벌이므로 그들을 제쳐놓고 자기 홀로 승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처절한 비극의 독주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쟁에 강한 인간은 편법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목표를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나 경멸하고 내어버립니다. 경쟁에는 오직 능률주의만 숭상됩니다. 이 때문에 도덕의 원리마저 경시되어 내동댕이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은 정당한 방법과 절차를 강조하기 때문에 비록 비능률적이라고 하더라도 꼭 지켜야 함에도 말입니다. 우리의 거의 모든 비극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울리히가 한국인이었다면 그는 최소한 추앙과 함께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비난도 함께 받았을 것입니다.

초점을 조금 바꾸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울리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식이 세상으로부터 어리석은 짓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리얼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러한 손가락질을 도무지 받고 있지 않습니다. 말씀에 따라 정당한 방법과 절차를 강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보다 더 경쟁하며 능률을 숭상하고 비인간화의 주역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한국 교회가 자기 교회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의 대명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경쟁이 없는 나라입니다. '정당한 경쟁'이라는 말도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는 말씀 대로 살아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막 10:44) 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사랑"(요15:12)해야 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세계 최고, 세계 제일이라는 세상의 찬사를 듣는 곳이 아니라 어리석음으로 인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래서 울리히 같은 바보들의 이야기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나라는 경쟁이 없는 나라입니다.



필자 : 최태선 /  출처 : 미주누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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