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우리교회의 은퇴 장로님이셨던 서삼수 장로님께서
2020년 4월 18일 토요일, 오후 3시쯤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를 사랑했던 서삼수 장로님을 다시 뵈올수 없어서 슬픔이 크지만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접을 받으셨을 줄 믿습니다.
아내인 서후임 권사님과 아들 내외 그리고 모든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길 기도드립니다.
지금 코로나사태로인해서 장례절차는 상의된바 없으며
성도님들은 가정에서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나 주일이면 미소 그득한 얼굴로 안부를 물어 주시던 장로님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서 삼수 장로님
늘 예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 날 예뻐 해 주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늘 다정스러우셨습니다
시국이 이리.....
배웅도 맘껏 못해 드리는 처지에 있지만 장로님 이제 주님 곁에서 세상근심 떨어 버리실테니 감사입니다....
사랑 많으신 장로님의 영혼을 귀하게 받으신 주님
이제 남은 우리들은,
장로님의 선함을 배운 우리들은, 그 다정함을 배우겠습니다.
장로님~
안녕히 가세요
서후임 권사님
삼가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온을 기도합니다..
송혜윤 집사 올림
그렇게도 어려움을 많이 겪으셔서 좀 더 건강하게 지내시면서 좋은 추억 만드시고 사모님과 행복하게 지내시길 기대했는데, 안타깝습니다.
늘 구수한 사투리로 안부 물으시면서 격려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서후임 권사님, 힘 내세요!
그는 안동 하회 마을의 탈 처럼 생긴 인자한 모습입니다.
눈 두둥이 연붉은 빛에 부어 있었고, 웃을때 입꼬리가 올라가며 볼이 살짝 튀어나와 눈이 감기신다.
겉모습의 인자함 같이 속 마음도 따뜻하신 분이셨죠.
내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관아 ! 어려운 이민살이 참고 견디며 좋은 날을 기대해 보자."
작은 가게의 주인으로 이민 살이하는 우리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주일이면 하회탈처럼 무뚝뚝한 장로님의 인자한 모습에 또 참고 한 주를 버터보자 생각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약자의 편에 설 줄아는 분이셨습니다.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며 한 쪽으로 몰아가는 어떤일에서 그는
" 그게 다 가 아이다.!" 하셨다.
반대편에서 상처받을 누군가를 생각하고 계셨다.
오래전에 장로님으로 공천되었을 때에
장로님은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공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신적이 있다. 본인 말고 장로가 되어야 할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늘 예수 올바로 믿는 것이 중요하지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하셨다.
우리 셋째 성민이 태어났을때 카드 적어 주시며 축하해 주셨던 서 장로님, 이웃 집 따뜻한 영감님 같은 분이 었습니다.
어떤일이 던 남 탓하지 않으시는 분.
그 어떤 일이던 하나님께서 내게 지어준 일(사명)이다 생각 하며 묵묵히 그길을 걸어시던 분.
불평하면 벌써 진 것이다 생각하시며, 불평하며
남 탓 하는 저를 나무라시든 분이었습니다.
지난해 제가 교회로 다시 돌아왔을 제 손을 잡으셨다.
그리고, 나의 손등을 몇번이고 스다듬시고..
또 두들겨 치시며 " 잘 왔다. 잘 돌아왔다." 하셨다.
또한" 니 와이프 고생시키지 마라." 하시던 말씀이 내 귓전에 맴 돕니다.
별빛이 유독 또렷한 주일 저녁입니다.
대낮의 날씨가 얼마나 좋던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 잔디깍고 고장난 차 고치며 맛난 저녁을 먹으며 살아 있는 사람은 그냥 하루의 일상을 사는구나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요.
늘 건강이 않 좋으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병문안도 인사도 못 드렸는데, 하늘 나라로 떠나신 서 삼수 장로님 생각에 마음이 찹찹합니다.
부디 편한 곳에 가셔서 편히 쉬 십시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서 후임 권사님과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깊은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윤무관 권사 올림
최혜탁 올림
아시냐고
서 장로 마지막 가는 길
교회 앞이라고
이민 첫세대
델라웨어의 산 증인
한 분이 전해왔다.
칠십 육 성상
해방을 알리면서
해방둥이에 앞서
태어난다.
대구 신앙의 가정
달성 서씨 명문가의 핏줄
조신한 아내와
돌식이 돌권이를
길러온 그 이였다.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소박함과 소탈함
정겨움과 선선함을 익혀
모나지 않지만
호락호락하지도 않은
조선조의 선비처럼
살아온 속 깊은 사나이였다.
돌식이 돌권이란 이름을
아들들에게 지워준
그 한국적 영성의 결을
남몰래 사모했던 신앙인이었다.
돌 한반도의 돌
세계 속에 보석으로
놓기를 원했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유대인 할아버지 의사
의료사고로 돌권이를
삼십년 돌보면서
보내야 했던
그 눈물과 한숨의 시간들
그런 시련의 고통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잔잔하고 허허롭던 미소들
아름답고 고졸했다.
그 덕에 유대인 며느리로
하늘은 축복하셨나 보다.
너씽 홈에 보내시라고,
너씽 홈에 보내고도
밤낮으로 돌보던
두분의 그 정성들
삼십 청년을 눕히고
씻기고
하루에도 수십번
옷 갈아입히고 하면서
욕창하나 없게 했던
눈물겨운 정성,
주님 모시듯 올렸던
무궁한 사랑이었겠지.
그래서 부끄러웠었다,
너씽 홈에 보내시라고
드렸던 조언들이.
윌밍턴 중심가에 일궜던
샘스 스토어
흑인들 어려운 이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일궜던
삶의 일터들
조선 땅 대구 사내의
몸부림이었다.
일용잡화들을 통해서
그는 세계인이 되었다.
조선 사내에서
미국 땅 First State Delaware
중심상가를 말없이 호령했던
조선인의 자존심이려 했다.
일과 돌권이를 돌보면서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델라웨어 감리교회는
그의 신앙과 삶의 텃밭이었다.
두루두루 챙기고
어루만지던 속 깊은
신앙인의 자취를 남겼다.
잘 드러나지 않던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아우라였다.
큰 아들 대학가서
신앙으로 삶의 도전으로
방황할 때도
하늘향한 말없는
기도의 끈
놓지 않았던
드러나지 않는
신앙의 강골이었다.
그 아들 아비 마음닮아
크고 큰 바위되길 빈다.
돌권이 먼저 간
님의 땅
하늘의 하늘로
부활의 계절에
코로나 바이러스
죽음의 신을 허허롭게
나물하면서
생명의 님께로
골프치던 잰 걸음으로
고향가는 길
어서어서 올라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