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내 마음이 들리니?

송종남목사 0 8,633 2011.11.11 04:17
      저는 지금 한국에서 이 글을 씁니다. 아이티, 도미니카 선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주일을 지키고 곧바로 한국으로 날아온 탓에 몸이 몹시도 피곤합니다. 이렇게 빡빡한 일정을 잡으면서도 ‘나는 아직 젊으니까’ 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올해 90세가 되신 어머니께서 지난 9월에 넘어지셔서 수술을 하셨습니다. 연세가 높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셔서 수술을 잘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워낙 연로하신 탓에 식사를 전혀 못하시고, 또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니까 저도 잠을 거의 잘 수가 없어서 비몽사몽간에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이 아픔이 되어 뼈 속까지 찔러 댑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절절하게 맞는 말입니다. 제 자식이 아프다고 했으면 아마 저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갔을 것입니다. 온 신경이 그리 쏠리고 무슨 짬을 내서라도 가서 보고 와야 마음이 놓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넘어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또 수술을 하셔야한다는 말을 듣고도, 수술을 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저는 제 사정을 먼저 생각했었습니다. 곧바로 달려갈 수 없는 제 형편만 생각했었습니다. 제 마음은 안 그랬다해도, 저의 현실 속에서 어머니는 저의 일들 뒤에 두 번째 세 번째 그쯤에 계셨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무겁게 저를 짓누릅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를 36세에 낳으셨습니다. 딸만 세 명 있는 집안에 태어난 외아들이니 저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많은 분들이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제 어머니 세대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하시듯이, 저의 어머니 역시 아들인, 저에게 부담스러울 만큼 All In 하셨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 딸의 졸업식과 아들의 졸업식이 한날에 겹치면 제 부모님은 제 졸업식에만 참석하셨습니다.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은 제 차지였고, 어머니의 1순위는 항상 아들인 저였습니다. 성장한 후에도 딸이 저의 몇 배, 몇 십 배로 잘해 드려도 어머니는 성이 안 차셨습니다. 늘 찾아가고 곁에서 보살펴드리는 딸이 있는데도 겨우 일 년에 한번, 꿈결에 왔다 가듯이 다녀가는 아들에게 왜 그렇게, ‘집착’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간절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땐 그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솔직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굽은 나무가 오히려 산을 지킨다’고 늘 두 번째 자리에 있었던 딸은 오히려 어머니 곁을 지키며 보살펴드리는데, 그렇게 정성을 다해 당신의 심장처럼 아끼며 키운 아들은 어머니 곁에 있지 못합니다. ‘아들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열 끼 식사하신 것 처럼 좋다’ 라고 하시는데 그 얼굴을 보여드리지 못하는 곳으로 뚝 떨어져 와서 살고 있습니다. 잠깐 공부하고 돌아오겠다던 유학길이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아버지 곁을 떠났던 작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저의 어머니는 그렇게 밤마다 방문을 닫지 못하고, 불을 끄지 못하시고 저를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품에서 저를 떠나보내신 날부터 지금까지 그리하셨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처음 약간의 치매 증상이 왔을 때, 자꾸만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서 누우시며 날마다 누군가를 기다리셨다는 애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압니다. 그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 바로 저였다는 것을. 그렇게 정신이 조금씩 조금씩 흐려져가도 오직 하나의 얼굴만큼은 당신의 뇌리속에서, 가슴속에서, 눈에서 절대로 흐려질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알고도 남습니다. 알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습니다. 아니, 해드릴 게 없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아들이 바로 코 앞에 왔는데도 너무 기운이 없으셔서 이제는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잠만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들만 보면 무슨 그렇게 하실 말씀이 많은지, 제가 잠에 곯아떨어진 줄도 모르고 한 얘기 또 하시고 또 하시던 어머니가 한 마디도 못 하십니다.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늘 밥 먹는 아들 상 곁에서 그 모습만 보아도 배불러 하셨던 어머니...,식사를 전혀 못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마구 밥 먹는 모습을 보여드릴까 그런 생각도 해봤는데 제 밥 먹는 모습을 보실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저 역시 밥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어머니 곁을 떠나서 돌아가야 합니다. 생전에 다시 뵐 수 있을지 없을지도모르겠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두고 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저는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시 떠납니다. 내 어머니의 사나 죽으나 한결 같은 소원은 ‘우리 목사 아들, 우리 송목사가 목회 잘하기만을 바라시는 것’ 이니까요. 어머니는 눈조차 뜨지 못하고 암말 안하셔도 저는 듣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제 귀와 가슴에 너무도 크게 들립니다. ‘내 아들, 송 목사, 가서 잘 해라, 가서 교회 잘해라. 목회 잘 해라. 잘 해, 알았지?’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돋우시며 들려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너무도 분명이 제 가슴에 들립니다. 어머니를 통해 들려주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은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합니다. 돌아가서 뵙겠습니다.

- 한국에서 어머니 병실을 나서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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